헌법재판소가 24년 만에 ‘대법원 판결 취소’라는 칼을 빼들면서 ‘한정위헌’을 둘러싼 두 사법기구의 해묵은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헌재는 30일 ‘법원의 재판’을 헌재의 심판 대상에서 제외한 헌법재판소법 68조 1항(재판소원금지 조항)에서 “법률에 대한 위헌 결정의 기속력에 반하는 재판” 부분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법원이 헌재의 위헌 결정에 따르지 않고 판결을 한다면 그 재판은 헌법소원 대상이 되고 헌재가 취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정위헌’은 “법원이 …라고 해석하는 한 위헌”이라고 선언하는 헌재의 결정 형태다. “어떤 조항은 위헌”이라며 해당 법 조항의 효력을 없애는 ‘단순위헌’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대법원은 한정위헌 결정이 법적 근거가 없는 형식이고 법률의 해석·적용에 관한 법원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반면 한정위헌이 적법한 결정 형태라고 보는 헌재는 대법원의 말대로면 전부위헌이나 전부합헌 결정을 내려야 해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맞선다.

어떤 법 조항에 헌법상 문제가 있을 경우 단순합헌으로 결정하면 위헌 소지를 방치하게 되고, 그렇다고 단순위헌 결정을 자주 내리면 의회와 입법권을 과도하게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해석 방식이 있다면 그 부분만 막으면 된다는 취지기도 하다.

1991년 첫 한정위헌 결정 이래로 대법원과 헌재의 갈등은 지금까지 30년 넘게 이어져왔고 공개적인 법리적 충돌도 종종 벌어졌다.

양도소득세를 공시지가 기준(헌재)으로 부과할 것인지, 실거래가 기준(대법원)으로 매길 것인지를 놓고 두 사법기구가 부딪친 1995∼1997년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청구인은 이길범 전 의원이었다. 그는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부과된 소득세에 반발해 취소소송을 냈고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소득세법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재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대법원은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은 단순히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며 법적 효력을 무시한 채 재심에서 이 전 의원의 패소 판결을 내렸고, 헌재는 한정위헌 판단을 존중하지 않은 대법원 확정 판결을 아예 취소했다. 사상 초유의 재판 취소 사태였다.

두 사법기구의 갈등은 국세청이 2001년 실거래가 기준으로 양도세를 부과한 조치를 직권으로 취소하면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갈등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유예됐을 뿐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법조계에서는 두 사법기구가 정면으로 충돌할 경우 현재 법 체계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근본적인 문제로 꼽는 시각이 많다.

앞선 이 전 의원 사건에서는 제3자인 국세청의 조치로 상황이 종료됐으나, 헌재와 대법원 양쪽이 물러서지 않고 대립을 지속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을 대법원이 인정하지 않은 채 종전 법률 해석대로 판결을 하고 헌재가 그 판결을 취소하면 사건 당사자는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런데 대법원이 재심 청구를 기각하면 당사자는 그 기각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헌재에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가정 섞인 전망도 있다.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무한 반복이 벌어지게 된다.

첫 재판 취소 이후로도 1994년 국가배상법 사건이나 2008년 상속세법 사건, 2012년 조세감면규제법 사건 등에서 한정위헌 결정이 이어졌고 대법원은 계속해서 효력을 부정해왔다. 다만 헌재가 재판 취소로 응수하지 않아 갈등이 더 번지지는 않았다. 헌재 측은 최근 수년 동안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일부위헌 등 ‘임시 우회로’를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헌재는 “위헌 결정의 기속력을 부인하는 법원의 재판은 그 자체로 헌재 결정의 기속력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헌재에 부여한 헌법의 결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런 재판에 대해 예외적으로 헌법소원 심판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못 박으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헌법재판 전문가인 노희범 HB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대법원이 법률을 위헌적으로 해석했다면 예외적으로 가려내겠다는 의미로 보인다”며 “한국 사법체계를 고도화하고 국민의 사법 구제를 충실히 만드는 기회로 삼아야지 헌재와 대법원이 서로 최고법원의 위상을 다투는 것으로 변질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은 이날 헌재 결정이 나온 뒤 결정문 내용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