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한 영어 단어를 시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시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시집이 출간되었다.

북랩이 최근 109개의 영단어를 마치 퍼즐조각을 맞추듯 시적 감수성으로 재구성해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언어로 재탄생시킨 시집 ‘She, 그녀가 앞에 있다’를 출간했다.

이 책은 시인이 해석해 낸 언어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넘어 인간과 사물의 혼(魂)이 담겨 있는 철학적 메타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예를 들어 ‘만약(if)’이라는 생의 연결고리가 없다면 ‘인생, life’는 성립되지도 않으며, 우리의 ‘선택, choice’에는 이미 ‘냉혹(ice)’함이 불가피함을 암시한다. ‘불멸, immortal’은 ‘필멸, mortal’을 껴안고 있고, ‘노을 twilight’ 속에는 ‘빛과 어둠을 공유’하는 신비한 다리가 놓여 있다.

현직 영문과 교수로 있는 설태수 씨의 ‘She, 그녀가 앞에 있다’를 읽고 있으면, 눈을 감은 채 귀를 쫑긋 세운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인은 바람을 가르며 들려오는 우주의 모든 대화를 들으려는 듯 숨죽인 채 서 있는 듯하다. 시인은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을 맞춰 언어에 담긴 비밀스런 의미를 포착해 내고, 시인만의 독특한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낸다. 미세한 물줄기의 흐름을 탐지해 하나의 거대한 강물을 발견해 내듯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시인의 시적 감수성과 만나는 시간이 된다.

언어를 해체하고 나면 추운 벌판에 서 있는 앙상한 나목(裸木)이 드러날 것 같지만 시인이 재구성한 시의 세계는 오히려 따뜻하다. 본래부터 언어 속에 감추고 있었으되,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듯 절묘하게 재구성되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을 위무한다.

언어 속에 내재된 필연적인 존재의 비밀을 풀고자 시인이 세운 안테나에는 그렇게 많은 것들이 포착된다. 수천년 동안 인간과 사물이, 인간과 인간이, 사물과 사물이 교감하며 나눈 대화가 우리 언어에 아로새겨져 있음인가.

청보리밭에서 바람 따라 일렁이는 보리 이삭의 서걱거리는 소리를 듣듯, 언어 속에 물결치는 흐름을 느끼며 들려오는 내밀한 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것은 이 시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She, 그녀가 앞에 있다’
설태수 지음∣128×205∣150쪽∣11,000원∣2016년 8월 3일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