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와대 패션 화보 촬영이 논란을 빚은 가운데 세계적 명품 브랜드 구찌와 문화재청이 경복궁에서 패션쇼를 열기로 했다가 취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릴 기회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청와대 활용을 둘러싼 최근의 잇단 논란을 의식해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29일 문화재청과 패션업계 등에 따르면 문화재청과 구찌 코리아 측은 오는 11월 1일 경복궁 근정전 일대에서 ‘구찌 코스모고니 패션쇼 인(in) 서울 경복궁’ 행사를 열기로 했다가 최근 취소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청와대 관련) 화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심의를 받아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며 “여러 효과가 기대되지만 현 상황에서는 진행이 쉽지 않다”고 취소 배경을 설명했다.

구찌 측은 글로벌 규모의 행사를 위해 문화재청 등 관련 기관과 협의해왔다.

행사명인 ‘코스모고니’는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선보인 새 컬렉션으로, ‘우주기원론’이라는 뜻처럼 별자리에 담긴 신화 이야기 등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찌 측은 지난 5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몬테 성)에서 컬렉션을 처음 선보인 바 있다.

구찌 측은 경복궁이 가진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 행사를 준비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구찌 측은 ‘세계적 수준의 천문학이 연구되었던 경복궁의 역사적 가치, 그리고 천문에서 영감을 받은 패션쇼의 주제를 국내외로 널리 알리겠다’며 장소 사용을 신청했다.

이에 문화재위원회는 ‘관계 전문가 조언을 받아 경복궁이라는 역사문화유산의 가치를 강화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 확실히 고증받을 것’ 등 조건을 붙여 ‘조건부 가결’ 결정을 내렸다.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자 조선시대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근정전 일대에서 패션 브랜드 행사가 열린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찌 측은 외교 및 재계 인사, 연예인 등을 초청해 약 500명 규모로 행사를 열 계획이었다.

구찌 측은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근정전 앞마당을 중심으로 행사를 하되 행각(行閣·궁궐 등의 정당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을 모델이 걷는 무대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청와대에서 촬영한 파격적 포즈의 한복 패션 화보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자 문화재청은 구찌 측과 논의 끝에 행사를 취소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밤에 조명을 비춘 경복궁의 모습을 본 외국인은 많지 않다”며 “경복궁을 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이긴 하지만, 의도치 않게 정쟁화될 수 있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터놓았다.

구찌 코리아 측은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인 경복궁의 문화·학문적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오랜 기간 준비했지만, 최근 논란이 된 이슈 등 국민 정서를 충분히 고려해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최근 논란을 기회로 설익은 문화재 활용 방안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대중에 소개하고 적극 활용하는 것도 좋지만, 청와대를 둘러싼 잇단 논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구체적인 방법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건축사를 전공한 한 대학 교수는 “최근 흐름을 보면 문화유산을 활용하는 방안이 대세로 떠오르지만 어떻게 활용할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충분한 논의를 거쳐 중심을 잡고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